소소하지만 확실한 정보

1. 으르렁대던 프랑스와 프로이센

 

 

 

 

1848년 12월 선거에서 프랑스 최초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의 지지에 힘입어 쿠데타를 일으키고 큰아버지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이은, 프랑스의 두번째 황제로 취임해.

 

어린 시절부터 황제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국내 정책과 대외 정책에서 주도권을 쥐고 나서 빈 회의에서의 치욕을 딛고 프랑스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려고 노력했어. 프랑스 민족의 위대함을 역설하며, "만약 다른 국가들이 어떤 것을 얻으면, 프랑스도 역시 뭔가를 얻어야 한다." 라고 주장해. 실의에 빠져 있던 프랑스 국민들은 그를 '돌아온 나폴레옹 황제'로 여기며 열렬히 환영하지.

 

이어 크림전쟁, 이탈리아-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여하고 세계 각 지역에서 프랑스의 식민지 건설을 위한 노력을 하게 돼. 인도차이나 반도에 진출하고(베트남-프랑스 전쟁) 중국의 제2차 아편전쟁에 참여하며 미국의 남북전쟁에도 한 발을 걸쳐놓지.

 

근데 토토쟁이들처럼, 거의 모든 대외전쟁에서 지거나 / 이긴 전쟁에서는 엄청난 국력 소모를 하게 돼. 

 

예를 들어 미국 남북전쟁에서는 남부동맹을 지원.. 크림전쟁에서는 이기긴 했지만 러시아와 원수를 지고, 이탈리아-오스트리아 전쟁에서는 이탈리아를 도와 이기게 하나 갑작스런 프로이센의 개입으로,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강력한 통일 이탈리아가 탄생함으로써 위협적인 적을 하나 추가시키는 등등(여기서 이탈리아의 의도와는 달리, 교황청을 독립시키자고 주장, 전쟁에서 이탈리아를 돕고 나서 이기고 나니 적을 만드는, 아주 병신같은 짓을 한다. 또한 이로 인해 영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도 금이 가게 됨)..유럽 대륙 밖의 전쟁에서는 미국 남북전쟁을 제외하고는 승리하나 크나큰 국력손실이 동반되었고..(심지어 이 때 '조선'이라는 듣보잡 국가에 천주교 신부의 죽음을 핑계로 병인양요를 일으켰는데 패배하고서 물러난다;;)

 

결론적으로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나라들과는 모두 껄끄럽게 되었고 이미 적대적인 나라들과는 관계가 파탄남요.

 

 

한편, 빈 회의에서 영토를 넓힌 프로이센은 이 시기에 비약적인 영토확장을 꾀하는데,

 

(왼쪽 지도의 진한 보라색 --> 오른쪽 지도의 빨간색의 '북독일 연방'으로 커짐. 노란색은 북독일 연방에 속하지 않은 남부독일)

 

 

 

 

이는 전적으로 프로이센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덕택이었어. 처음엔 그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던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는 군비확장을 두고 의회와 충돌을 빚었는데 비스마르크와 여러 시간을 독대한 후 '의회와 대립과정에서 군주를 위험에 놓이게 하느니 차라리 그와 더불어 몰락하겠다'라고 충성심을 보인 그를 재상에 임명하게 돼.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강력한 군대를 앞세워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윗 지도의 빨간색 영역을 '북독일 연방'으로 묶는 등 하나의 독일 을 위한 작업을 충실히 진행하지.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의 주변에 이러한 강력한 통일국가가 형성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휴전을 중재하며 라인 강 유역의 영토를 프로이센에 요구해.(아까 "만약 다른 국가들이 어떤 것을 얻으면, 프랑스도 역시 뭔가를 얻어야 한다." 라는 원칙을 고수했다고 했지? 바꿔 말하면 '내 꺼는 내 꺼. 니 꺼도 내꺼.' 라는 거..)

 

빈 회의 때 프로이센에게 베스트팔렌 지역을 떼어준 프랑스는..무언가 아쉬워지자 그 영토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이를 쿨하게 거절하고 대신 네덜란드령 룩셈부르크 지방을 매입하는 것을 용인해줘. 

 

 

 

(마치 유비가 오나라에 형주의 반환을 약속했으나 관우가 거부한 것과 같은 상황..)

 

 

여기서 영국의 중재로 룩셈부르크는 중립국이 되지만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되고..비스마르크 또한 나폴레옹 3세가 통일 독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도를 간파하며 서로 사이는 굉장히 나빠져. 비스마르크는 언젠가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야 됨을 느끼지만 아직 그의 군대가 충분히 강력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내치를 다지고 독일 소국들과의 연맹을 공고히 하는 것에 주력하지. 1867년, 비스마르크는 관세동맹을 통해 남부독일까지도 제도적으로 북독일 연방과 묶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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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페인의 국왕자리와 '엠스 전보사건'

 

 

그러던 어느 날, 1868년 스페인의 이사벨 2세가 혁명으로 실각한 후 스페인 왕위가 공석이었는데 스페인의 혁명파는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의 사촌인 '호엔촐레른(Hohenzollern) 대공 레오폴드'에게 이를 계승하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해와.

 

(이사벨 2세의 초상화)

 

여기엔 다소 복잡한 스페인 왕실의 사정이 있었는데..스페인의 왕위를 놓고 17세기 말부터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왕가가 경쟁하다가 루이 14세가 자신의 손자인 필리프를 스페인 왕에 밀어넣고 나서 프랑스와 스페인을 합병하려고 했으나 왕위계승전쟁에서 패배, 부르봉 왕가는 프랑스의 그것과 스페인의 그것으로 쪼개졌어. 하지만 같은 혈연인 만큼 끈끈한 우호관계를 유지하지.

 

하지만 페르난도 7세가 별세하고 갓 왕위에 오른 이사벨 2세의 나이는 불과 '3살' 이었어. 게다가 당시 부르봉 왕가의 관습법인 '살리카법'에 따르면, 여성은 왕위를 승계할 수 없었지. 따라서 여왕의 삼촌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고 여왕도 내치,외치에 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혁명으로 실각하게 돼.

 

(사촌지간인 호엔촐레른 왕조의 '빌헬름 1세'(왼쪽)와 '레오폴드 공')

 

 

스페인의 입장에서는 여러 해 동안 지배를 받던 프랑스 왕가의 인물보다는 새로히 떠오르는 프로이센 왕가의 튼실한 응딩이에 기대고 싶었겠지.

 

당연히 프로이센은 환영의 입장이었지만, 레오폴드 공은 야심이 없는 인물이었나봐..이를 쿨하게 거절해.

 

근데 뭔가 냄새를 맡은 비스마르크는 이것이 전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음을 직감하고, 국왕인 빌헬름 1세의 반대에도 불구, 비스마르크는 스페인에 특사를 파견, 결혼수락발표를 해버려.(1870년 6월 21일)

 

여기에 나폴레옹 3세는 당시 방광결석증으로 앓고 있어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도 노발대발하며 거세게 반발해. 프랑스의 서쪽, 동쪽으로 적을 맞이하는 상황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거든. 1870년 7월 11일, 나폴레옹 3세는 라인란트-팔츠(Rheinland-Pfaltz) 주의 작은 마을, '바트 엠스'(Bad Ems)에서 휴양 중이던 빌헬름 1세에게 주프로이센 프랑스 대사였던 '빈센트 베네데티' 백작을 파견, 여기서 빌헬름 1세가 프랑스의 요청(스페인 왕위를 받지 마라)를 받아들이면서 사태가 일단락 되는 듯 했어.

 

근데 이 작은 외교적 승리에 도취되었는지, 나폴레옹 3세는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이틀 뒤인 7월 13일, 베네데티 백작으로 하여금 다시 하나 번 빌헬름 1세를 방문하게 하여 '이번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호엔촐레른 왕가의 대공이 절대 스페인의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는 보장을 해달라.'라고 전달하도록 시켜.

 

(흰 수염의 빌헬름 1세를 방문하는 베네데티 백작(오른쪽))

 

요구 자체도 다소 무례했던 데다가, 베네데티 백작은 사전 약속도 없이 아침 산책 중이던 빌헬름 1세를 불쑥 찾아와 불러세운 것. 하지만 빌헬름 1세는 백작의 요청을 최대한 정중하고 우호적으로 거절했으며 이 즉석 회담 내용은 국왕의 비서가 전보로 작성해서 베를린의 비스마르크에게 보냈어.

 

(전보로 보낼 내용을 메모한 문서와 실제 전보 내용)

 

국왕 폐하께서 제게 이렇게 써 주셨습니다. 

 

'베네데티 백작이 산책로에서 짐을 가로막더니 상당히 성가신 태도로 '짐은 호엔촐레른 대공의 스페인 왕위 계승에 관해 다시는 동의하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본국에 전보로 보내도록 윤허해 달라고 요구했소. 그런 식의 약속은 옳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만큼, 짐은 이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소. 물론 짐은 그에게 '짐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고 당신이 파리나 마드리드를 통해 더 잘 알고 있을테니, 우리 정부가 그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틀림없이 알 것'이라고 말했소.'

 

폐하는 프랑스 황제에게 이번 베네데티 백작의 요청과 그 거절사실에 대해 양국 대사와 언론을 통해 의견을 교환해도 좋다고 제안하셨습니다..

 

 

이는 프랑스의 강경한 반발에 대해 '나는 잘 모르는 바이니 이를 보장할 이유도 없지 않느냐' 라고 거절하면서 양국 간의 대화 창구를 열어놓겠다는, 온건한 화답이었어. 하지만 이를 본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입지를 굳히고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좋은 기회임을 포착,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바꿔서 언론에 배포해.

 

 

호엔촐레른 대공의 왕위 계승 포기 소식이 프랑스와 스페인 정부에 전해지자, 엠스의 프랑스 대사가 찾아와 '빌헬름 1세는 호엔촐레른 왕가가 앞으로 스페인 왕위에 일절 관여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는 전보를 보낼 수 있도록 승인해달라고 요구했다. 폐하는 이로 인해 대사의 접견을 거부했으며 보좌관을 통해 더 이상 프랑스 대사와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사실 여기까지만 해도 양국간의 외교 결례로 충분히 논란이 될 만한 사건인데, 이 내용을 본 프랑스의 통신사 아바(Havas)는 번역 과정에서 두 가지 결정적인 오역을 저질러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어. 프랑스 언론에 실린 그 오역은

 

- 대사의 '요구'를 질문(il a exige)라고 오역.

- 보좌관(adjutant)라는 단어를 그대로 썼는데, 이는 독일어로 꽤 고위급의 관리라는 뜻임에 반해, 불어로는 '하사관'을 뜻한다는 점.

 

따라서 프랑스 언론에서는 '그저 질문을 하러 간 우리나라 대사를 빌헬름 1세가 문전박대한 것은 물론, 일부러 하사관 나부랭이에게 회신을 들려보내 모욕을 줬다.' 라고 실어버려. 또한 이 보도가 나간 것은 7월 14일로 이는 프랑스 국경일인 '바스티유 기념일' 이었음.

 

즉, 프랑스인들은 1년 중 가장 애국심이 충만할 시기에 자국의 안보와 관련된 핵심 요구사항을 독일의 국왕이 모욕적으로 거부했다는 소식을 접한 셈이야.

(나중에 이 오역 소식을 들은 비스마르크는 '내 뜻대로 되었다' 며 엄청 기뻐했다고 해.)

 

(프랑스 시민폭동의 시발점이 된, 광주 MBC 습격사..아니,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오른쪽엔 바스티유 광장에 세워진 기념탑)

 

 

따라서 프랑스 국민들은 모두 피꺼솟, 프로이센과 전쟁을 치뤄야 한다고 난리였지. 비스마르크가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뜨려는 셈이었어.

 

양국의 국왕, 나폴레옹 3세와 빌헬름 1세는 전쟁을 치르고 싶어하지 않았지만,(나폴레옹 3세는 방광결석 등 개인 건강의 문제와 그 당시 멕시코 공략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음.) 비스마르크는 이를 절호의 기회로 판단, 작은 기회를 빌미로 전쟁을 유도했어. 착실히 군대를 만들어놓은 프로이센에 비해, 프랑스는 전쟁 준비도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황... 외교적으로도 고립되어 있었고..하지만 프랑스는 국민들의 성화에 못이겨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결과는?

 

(독일의 휴양도시, 'Bad Ems'와 전보사건을 기념하는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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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보-불 전쟁과 프랑스의 처참한 패배, 그리고 굴욕..

 

 

프랑스의 국민들은 전쟁이 시작되기를 바라고 있었어. 위대한 프랑스제국의 영광을 다시 한 번 재현하길 원했던 거지. 하지만 상황은 반대로 전개되었어.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함에 따라, '관세동맹'이라는 약한 울타리에 묶여 있던 남부독일은 비스마르크가 기대한 것처럼 앞다투어 프로이센 측에 붙어 함께 싸웠고, 프랑스는 영국이나 오스트리아의 참전을 기대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앞서 말한 룩셈부르크를 둘러싼 프랑스와의 회담 내용을 런던 타임즈에 흘리고 영국은 이에 프랑스 측 및 프로이센 측과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하라는 내용의 조약만 맺었을 뿐 수수방관했지.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프랑스의 편은 아무도 없었어...

 

그리고 프랑스가 자랑하던 포병 부대는 프로이센의 잘 훈련된 기병대에 의해 무참히 썰리고 말아.

 

(프랑스가 극비리에 준비했던 기관총, '미트레이외즈'(Mitrailleuse). 워낙 극비리에 준비를 한 나머지 막상 전장에 투입되었을 땐 사수 중 아무도 조작하는 방법을 몰랐다고..)

 

 

프랑스 군대는 '마르스라투르 전투'와 '그라블로트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대에 참패하고 '스당 전투'에서는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힘요.

 

(포로로 나오는 나폴레옹 3세를 맞이하러 나오는 비스마르크와 둘이 나란히 앉아있는 그림)

 

 

황제가 포로로 붙잡힘에도, 파리 시민들은 '파리 코뮌'을 조직하고 4개월여간 저항하다가 마침내 항복하고 말아. 프로이센 군은 파리 시내에서 거리 행진을 벌인다.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독일제국의 초대 황제로 취임하는 빌헬름 1세와 흰 옷의 비스마르크.)

 

 

이후 나폴레옹 3세는 폐위되고 프로이센은 알자스-로렌 지방을 먹었으며(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배경이다), 5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을 갚을 때까지 군대를 프랑스에 주둔시키기로 하지만(프랑크푸르트 조약),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프랑스 국민들은 금,은,보석 닥치는 대로 돈이 되는 물건이란 물건을 모두 배상금 갚는 데 사용, 석달도 안되어 50억 프랑을 모두 갚는 놀라운 일이 발생해.(이는 나중에 1차 세계대전 후 독일로 하여금 엄청난 배상금을 빨리 갚도록 독촉할 수 있는 밑밥이 됨.)

 

 

(보불전쟁 이후 유럽지도. 파란색으로 칠한 부분이 알자스-로렌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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