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지만 확실한 정보

 

 

 

 

(1) 메이지 시대의 일본 제국.

 

1868년 1월 3일, 왕정 복고와 함께 메이지 정부가 설립되었다.

 

이전의 막부 시대가 종결되고 일본은 일본 천황을 실질적 국가 원수로 받드는 새로운 나라를 열었으며, 부국강병의 개혁들을 실시하였다.

 

 

 

일본 제국 메이지 천황

 

일본은 징병제를 채택하고 서양의 여러 무기를 수입하여 근대적 군사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10만이 넘는 근대적 육군을 양성하였다.

 

서구식 제복을 통해 일본 근대 육군을 완성시켰으며, 재정의 기반을 마련하여 군사력 강화에 박차를 가한다.

 

1890년 근위 사단 외 7개사단, 홋카이도 둔전병까지 포함하여 현역 5만 3천 명과 예비역 20만 명이 천황의 직속 군대로 편입되었다.

 

이와 함께 여러 함선을 수입하고 제조하고 근대적 해군 훈련을 통해 제국 해군을 양성하였다.

 

 

 

일본 제국 육군 병사 모습

 

 

일본 제국 육군 지휘관

 

* 명치(明治 : 메이지 천황) 8년제 근대식 일본국 군복 (출처 - 네이버 역개루 카페)

 

 

 

칼을 들고 있는 일본 근대 지휘관(만주 전선???)

일본은 강화도 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침투해나가기 시작하였으며, 1895년에는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대만을 합병하였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3억 4천 5백만 엔의 배상금을 얻어냈으며, 여기서 75% 가량은 군사비에 활용하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일본 제국 본토의 재해(화산, 지진) 대책금 및 근대 교육 기금, 식민지 대만 경영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요동과 남만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침투하였다.

 

하지만 러일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큰 피해를 얻었다.

 

우선 러일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교전 20개월 동안 43,110명의 일본 육군 병사가 사망하였고 17만 명이 부상당하였다.

 

게다가 22만 명이 현지 토착 지역(만주)에 대한 부적응으로 병에 걸렸으며, 여기서 63,601명이 사망하였다.

 

특히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서양식 제도와 군사 등 거의 모든 것을 답습하였지만, 지휘관의 교리는 구시대적인 전술에 국한되었다.

 

 

 

칼을 들고 군 장교가 일선에 나가서 돌격한다거나 병사들도 소총에 칼을 꽂아 돌격한다는 등 구시대적인 도검 및 총검 돌격술은 문제가 많았다.

 

태평양 전쟁 관련 일화나 2차 대전 당시 일본군 지휘관을 보면 옆에 칼을 차고 다니는 장교들도 많이 나오며,

 

특히 2차 대전 관련 게임이나 영화에서도 칼을 들고 돌격하는 일본군의 모습을 공공연하게 볼 수 있다.

 

(러일 전쟁 전투 중의 하나인 203고지 전투의 승리 요인을 구시대적인 착검 돌격으로 판단하고 이후의 전술 교리에서 정식으로 채택함)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일본 국민은 증세, 소금 전매제 신설, 담배 전매제 강화 등으로 심각한 생활난에 처하여 엄청난 생활고에 시달렸으며,

 

젊은 청년을 병사로 강제 징집하여 108만 명이나 동원 병력을 편성하는 등 제국의 피로는 극도에 달하였다.

 

게다가 전쟁 배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러시아의 남사할린만을 얻어야 한다는 불만에 일본 국민은 폭동을 일으켰다.

 

일본 경찰에 의해 폭동은 진압되었고 러시아와 협정을 맺어 포츠머스 조약을 맺었다.

 

한편 러일 전쟁을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하게 침투시킨 일본은 1905년 을사 조약을 맺었다.

 

그런데 1907년 이후 조선인들의 저항이 급속히 확산되자 대규모 징벌 조치와 학살이 이루어졌는데,

 

일본은 육군과 경찰을 동원하여 의병 1만 7천 명을 살해하고 3만 7천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리고 1910년 대한 제국을 완전히 합병하고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여 이 자리에 일본인 조선 총독을 임명하였다.

 

일본은 조선 내에 16,214개의 헌병 경찰 기관, 2만 2천 명의 헌병, 그리고 20만 명의 헌병 보조원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행정관과 사법관은 물론 경찰과 학교 교원(교사)들까지 칼을 패용하였다.

 

 

 

(제복을 입고 칼을 찬 일본인 교사)

 

 

 

일본 제국은 대략 초기 동안 조선, 대만, 요동, 남만주 지역에 대한 영향력 침투에 성공하였으며, 제국의 경계선을 넓혀나갔다.

 

그리고 국가 자본의 50% 가량을 군사 자본으로 사용하여 국방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이는데, 이를 거론하자면 다음과 같다.

 

제국 부국 강병 전략 채택의 일환으로 시작된 강력한 무기 체계 구축을 육해군 군수 공장이 산업의 중심으로 떠올랐으며,

 

군사 공업은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육군 도쿄와 오사카의 포병 군수 공장, 해군 도쿄조병 공장, 요코스가, 구레, 사세보, 마이쓰루 공장 등은 대규모 군수 공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소총은 청일 전쟁이후에 국산 무라다 연발총을 개량한 30년식 보병총을 전군이 가지게 되었으며, 러일 전쟁 후에는 개량되어

 

38년식(1905) 보병총이 제식총으로 사용디었다.

 

그리고 화포는 야전속사포와 산포가 제작되었으며, 오사카 군수 공장에서 대량의 화포를 생산하였다.

 

일본 해군도 급격히 강하게 성장하는데, 훗날 미국과 싸울 정도로 막강한 해군력을 갖추게 된다(미드웨이 해전에서 운지하긴 하지만~).

 

1907년 1등 수냥하 쓰쿠나미(배수량 13,750톤)와 1910년 1등 전함 사쓰마(배수량 19,150톤), 그리고 2등 순양함 이한(4,100톤) 등이 완성되었다.

 

이후 배수량 27,500톤의 금강이란 군함을 수입하였으며, 이렇듯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2) 다이쇼 시대의 일본 제국.

 

 

 

일본 제국 다이쇼 천황

 

메이지 천황을 계승하여 즉위한 다이쇼 천황이 재임한 1912년부터 1926년까지를 통칭상 '다이쇼 시대'라고 정의한다.

 

이미 일본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그리고 조선 병합을 통해서 실질적인 동아시아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라 미국, 영국 등 서구 사회로부터 국제 사회에서의 인정을 받아 그 위상이 확보되어 강력한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미국은 일본의 식민지 확장 과정을 인정하고 지지해주었으며, 일본이 너무 앞서가면 견제도 하긴 하지만 그다지 심한 태클은 걸지 않았다.

 

'다이쇼 시대'는 일본 제국의 메이지, 다이쇼, 쇼와 시기에서 그나마 조용한 시기인데, 이 시기는 산업 육성 및 식민지 경영에 총력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제국의 기반을 튼튼히 다져 나가고 식민지에 대한 경제적 지배도 강화하여 이를 통한 안정적인 착취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영일 동맹

 

(훗날 두 나라는 적이 된다.)

 

이때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1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였는데, 일본은 영일 동맹(영국과 일본의 동맹)을 근거로 연합군 진영에 참전하여다.

 

1914년 8월 23일에 일본은 독일에 대해서 선전 포고를 단행하고 중국에 있어서의 이권 확보를 위해 중국 산둥 반도의 칭따오의

 

독일군 요새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독일 이권을 접수하였다.

 

그리고 일본 해군은 독일령 남양 제도를 점령하였고 남태평양의 독일군을 공격하여 남양 군도의 지배권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1917년 11월 이시이 키쿠지로 주미대사와 랜싱 미국무장관은 일본이 중국에서 특수 권익을 누릴 수 있도록 협의하였으며,

 

대신에 일본은 필리핀에서 미국의 권익을 인정하는 등 일본과 미국 두 나라는 사이 좋게 강대국들의 권익을 교차 인정하는 방법으로

 

절대적 이익을 취하였다.

 

산둥 반도의 독일군 기지를 공격하여 점령에 성공, 그리고 남태평양에 구축해놨던 독일군의 식민 기지도 빼앗았다.

 

그리고 미국과 연합군의 활약으로 1차 세계 대전이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일본은 승전국의 입장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일본은 세계 대전의 승리와 함께 '다이쇼 데모크라시(1911~1925)'로 경제 호황을 누렸는데,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수출액이

 

7억 3천만 엔에서 20억 3천만 엔으로 3배나 증가하였다.

 

또한 해운업의 발전으로 이익을 보았으며, 무역 외 수지가 크게 증가하였다.

 

게다가 대외 부채는 3억만 엔 이상이 감소하고 대외 채권은 15억만 엔 정도나 증가하는 등 엄청난 경제적 변화를 가져왔으며,

 

공업 생산은 4.9배가 증가하고 1919년의 수출입총액은 12억 4천만 엔에서 44억 9천만 엔으로 증가하면서 일본 자본주의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어 엄청난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은행과 회사의 신설 확장 사업으로 투자된 자금은 143억 7천만 엔이었고 상업 부문은 3.6배, 운수 부문은 4.2배 등으로 크게 상승하였으며,

 

중화학 공업은 22.1% 가량에서 33.1% 로 상승하는 일본 제국 산업의 전반적인 고도화가 진전되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은 일본 산업의 새로운 구축점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평남 진남포는 일본의 광업 경제권이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일본의 국내 기업은 미국이나 외부 서양 열강 등 같은 제국주의 국가 지역에까지 진출하여 미국의 상호 협조 아래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포스터

 

"아군의 육해공의 협공으로 시베리아의 적을 소탕함!"

 

1차 세계 대전 말기 새로 집권한 러시아의 공산 정권이 브레스트 - 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독일 제국과 단독 강화를 맺으려 하자

 

미국, 영국을 비롯한 강대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로 군대를 파병하였고 영일 동맹에 의거하고 일본도

 

시베리아에 군대를 파병하여 붉은 군대와 싸웠다.

 

이는 10월 혁명으로 집권한 볼셰비키당의 공산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일본군이 무력으로 개입한 '시베리아 출병 사건'이다.

 

처음에는 일본이 단독으로 출병하려고 하자 미국이 공동 출병을 제안하고 이리하여 미군 7천 명, 영국 및 프랑스군 5천 8백 명,

 

그리고 일본군 1만 2천 명 등이 선발되었다.

 

하지만 <동양경제신문>과 <오사카아사히신문>은 격렬히 반대하였으며, 이는 묵살되고 일본은 이후 7만 5천 명까지 대규모 병력을 투입시킨다.

 

일본은 사할린, 연해주, 만주 철도 등을 침공하였고 시베리아 오지의 바이칼 호수 동부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붉은 군대와 파르티잔이 게릴라 전법으로 일본군을 괴롭혔으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그리하여 러시아인의 민심은 공산당 정부로 향했고 결국 시베리아의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가 붉은 군대의 공세로 붕괴하자

 

일본군도 철수하였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대외 전쟁에서 겪은 첫 번째 완패였으며, 일본 국내에서는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한편 일본 제국 내에서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12만 8천 호의 가옥 파괴,12만 6천 호의 반 파괴 가옥, 44만 7천 호의 화재 소실 가옥, 사망자 1만여 명과 부상자 10만 3천여 명 등

 

자연적인 재해로 인해 일본 도쿄권은 큰 타격을 받았으며, 이게 문제가 아니라 당시 부상하던 일본 자본주의가 큰 위기를 맞이하였다.

 

게다가 1920년 공황과 1922년 공황으로 위기에 처했으며, 재정 부흥을 위해 영국으로부터 25백만 펀드, 뉴욕으로부터 1억 5천만 달러의

 

공채를 모집하였지만, 외채로 인해 국제 신용이 떨어졌다.

 

또한 수입 증가로 일본 경제는 위기가 더욱 심화되어 급기야 1927년 금융 공황으로 폭발하였으며, 불황은 계속 이어지게 된다.

 

시베리아 출병의 실패와 공황은 일본 자본주의와 제국의 명예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친 것이다.

 

(3) 쇼와 시대 전기의 일본 제국.

 

 

 

 

일본 제국 쇼와 천황

 

1929년에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였다.

 

미국 뉴욕 주식 시장의 붕괴와 유럽산과 미국산 제품의 구매력이 감소하였다.

 

임금 감소와 소비 위축은 구내 시장의 쇠퇴를 유발하였으며, 세계 무역은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당연히 일본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극심한 불황 상태에 빠져있었고 정치적으로는 여러 사상이 대립하였다.

 

황도파,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무정부주의), 통제파 등이 할거하고 있었으며, 대내외적인 경제 및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1930년대 초에는 쿠데타로 군부들이 집권하였고 쇼와 천황과 그 측근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고 군부의 폭주와 함께

 

일본 제국의 미친듯한 팽창 정책이 시작되었다.

 

일본의 학자가 묘사한 "술에 취한 여우가 계속 달리는 꼴(?)"은 쇼와 시기의 일본 제국의 팽창의 단면을 꼬집어내기에 좋은 명문이다.

 

[1] 만주 사변

 

 

 

만주 주둔 일본 관동군

 

1931년 관동군 사령관으로 혼조 시게루 중장이 임명되었다.

 

그는 조선을 병참 기지로 만들어 만주로 진출하는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중국의 만주를 침략하기 위한 자작극을 모의하였다.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류탸오후에서 만철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이를 당시 중국 군벌인 장쉐량의 소행이라고 발표한 후 만주 침략을 개시하였다.

 

그리하여 펑톈 성을 공격하고 근방의 만주 철도를 점령하였으며, 동대영, 봉천 비행장, 지린 성, 요동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때 당시 조선에 주둔해 있었던 일본인 조선 주둔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는 정부의 명령이 없이 독단적으로 만주 남쪽을 침략하여

 

전선은 더욱 확장되었고 만주는 일본 관동군에 의해 완전히 유린다하였다.

 

1931년 10월에는 진저우를 폭격하고 만주 남부가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으며, 11월에는 치치하얼을 점령하고 동북 3성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진저우와 하얼빈 등 만주의 거점이 함락되면서 만주의 대부분 지역이 일본의 손에 떨어졌으며,

 

<만몽공화국 통치대강안>을 기조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내세워 일본 관동군이 독단적으로 만주국을 건설하고 이를 황제로 세웠다.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황제, 푸이(일본 관동군의 꼭두각시)

 

국제 연맹은 강력하게 일본군의 철수를 경고하였지만,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독단적으로 1933년 3월 국제 연맹을 탈퇴하였다.

 

그리고 정당 내각 정치는 종결하고 일본의 완전한 군국주의 체제가 확립되어 침략 전쟁을 서두른다.

 

[2] 중일 전쟁

 

만주 사변으로 중국의 동북부를 빼앗은 일본은 1935년 이후 북부 지역의 분리 공작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노구교 사건을 지어 일본은 대중국 정책의 기본 방침에서 전쟁은 필연적이라고 인식하였다.

 

1936년 8월 히로타 내각은 장기 국책으로 남진과 북진을 계획하였고, 화복 분리 작업을 계획함과 동시에

 

1937년 7월엔 노구교에서 중일 양군이 충돌하여 중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날 저녁 관동군 혼성 2개 여단, 조선군 제20 시단이 화복 파견 명령이 내려졌으며, 일본 육군 육전대는 중일 전쟁에 수십만 명이 투입되어

 

작전을 시작하여 만리장성 관문을 돌파하고 중국 내지로 침입해 들어갔다.

 

베이징과 톈진을 점령하였고 상하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상하이 중국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은 70만에 달하는 병력을 상해 - 남경 방어선으로 집중시켰지만, 너무 밀집한 탓에 일본군의 함포 사격 1발에

 

200명 전사를 기록하는 등 많은 병력을 잃어버리고 23만 명의 중국군이 사망하고 일본군은 고작 4만 명이 사망하였다.

 

이후 일본은 국민당 정권의 중심이었던 난징을 함락하고 중국인 30만 명을 학살하는 난징 대학살을 저지른다.

 

 

 

일본 제국의 중국 점령 상황(1940년경)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본군의 학살과 작태로 인해 미국은 일본을 제재하기로 결정하고 대일 수출을 금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ABCD(미국 + 영국 + 중국 + 네덜란드) 포위망을 통해 일본에 대한 압박을 시작해나간다.

 

일본은 중국 동부 지역의 중국 대도시들을 점령하고 수백만 명의 중국군을 죽이고 삼광 작전으로 모든 것을 살상하고 분쇄했지만,

 

중국은 엄청난 인력으로 바로 그 손해를 메꾸어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으며, 전선은 교착 상태에빠졌다.

 

 

 

충칭 대공습 때 사망한 중국 시민들

 

8년에 걸쳐서 1200만 명의 중국인이 학살되었고 국공 합작을 통해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저항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참고로 중일 전쟁에서 죽은 중국군의 숫자는 180만 명이고 민간인은 약 2천만 명이 사망하였다.

 

현 대한민국 인구의 40% 정도가 죽은 셈이다.

 

일본의 사상자(사망자 + 부상자)는 200만 명 정도나 된다.

 

(4) 쇼와 시대 후기의 일본 제국.

 

 

 

일본 제국의 최대 판도

 

1937년 4월 일본 제국 국방부 해군 중앙부는 <국책요강>에서 남방은 제국 국방 강화, 인구 문제 해결에 중요한 지역이므로

 

제국이 앞으로 영광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방 진출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밝혔다.

 

1940년 8월 6일 기획원 제5 위원회가 추진한 <남방 경제시책 요강>에서는 구미에 대항해서 대동아 자주 경제 확립과

 

내정 전반에 걸쳐서 일본 제국의 국토 방위권을 획득해야함을 엄격히 밝혀두었다.

 

일본의 남방 진출은 영국과 미국의 권익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구미 세력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한편 1940년 여름에 유럽 전선에서 독일이 승세를 타고 있었는데, 미국은 이를 계기로 일본이 남방에 진출할 것을 염려하여

 

대일 경제 제재 조치를 추하였음, 1940년 7월에는 대일설철 및 석유 수출에 허가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렇듯 미국은 경제 조치를 통해 일본의 남방 진출을 경계하였다.

 

1941년 8월 1일에는 석유의 대일 수출이 금지되었고 난령의 동인도는 1941년 7월 28일에 대일 수출 허가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연합군의 과도한 경제적 조치는 일본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전쟁 수행에 있어서도 큰 타격을 주었다.

 

당시 고노에 내각은 강경 정책을 주장하는 일본 군부와의 의견 차이로 사직하고 일본 군부는 <남방작전 계획 입안>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일본 제국군 남방군 및 남해지대에 대한 천황의 명령 즉 대육령이 1941년 11월 6일 발령되었고 데라우치 대장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남방군을 편성하고 필리핀 제14군, 태국과 미얀마 제15군, 화란령 인도지나 제16군, 말레이시아 제25군 등을 할당하였다.

 

 

 

칼을 잡고 있는 청년 시절의 도조 히데키

 

 

 

일본 제국 도조 히데키 수상(임기 1941~1944)

 

1941년 10월 18일에는 도조 육상이 수상에 취임하여 도조 내각이 들어섰으며, 12월 8일 일본은 남방지역 점령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하와이 진주만의 미군 기지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남방에서 군사 행동을 전개하여 전면적인 승리를 만끽하였다.

 

1940년에 이마무라 히토시 장교가 16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자바섬 공략에서 9일만에 10만이 넘는 영국군과 네덜란드군을 항복시켰으며,

 

필리핀 지역을 공격하여 7만 명이 넘는 미국군과 필리핀군을 항복시켰다.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미국군(이때가 태평양 전선에서의 일본 리즈 시절)

 

일본군은 1941년부터 1942년까지 태평양 전선을 누비면서 영국군과 미국군, 그리고 네달란드군과 동남아 군대를 격퇴하였다.

 

 

 

 

 

 

1942년경 절정의 일본 제국 영향권

 

1942년까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을 누비면서 일본 육군의 50만 명이 동남아시아 방위를 위해 섬에서 방어 진지를 구축하였으며,

 

해군도 이때 태평양 방위를 위해 강력한 함대를 구축하였다.

 

이때 일본 해군은 대미전(미국과 전쟁함)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괌과 필리핀을 공격한 뒤 내항하는 미주력 함대를 서태평양에서 요격한다는

 

것이 일본 해군의 주요한 전략이엇다.

 

1941년 8월 미일 관계의 긴박성에 따라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관은 개전벽두에 하와이 진주만에 항공기습작전 실시를 군령부에 제안하고

 

진주만 공격안이 구체화되어 나가노 군령부 총장은 이를 '제국해군작전방침'으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주력항공모함 6척이 하와이 기습을 위해 파견되었다.

 

1941년 1월 5일에는 하와이 기습과 남방작전에 관한 천황의 명령 즉 대해령이 연합함대에 발령되었으며,

 

개시전 해군은 전함 10척, 항공모함 10척, 중순양함 18척, 경순양함 20척, 구축함 112척, 잠수함 65척, 그 이외 함정을 포함하여 391척과

 

146만 톤으로 미 해군과 격줄 만큼 강력한 해군력으로 대미 전쟁을 개시하였다.

 

미국과의 전체적인 국력 및 인구차를 비교하면 미국 본토 인구가 1억 3200만 명인데, 일본은 본토 인구가 7200만 명이었다.

 

하지만 일본 제국 내의 식민지 인구까지 합하면 1억 3900만 명으로 미국보다 인구가 많았지만, 동원 수준은 미국에 비해 크게 떨어졌고

 

무엇보다도 1인당 gdp는 미국이 일본의 3배였으며, 석유나 여러 무기 성능 등 모든 것이 미국이 압도적이었다.

 

일본 해군은 승승장구하며 미국 식민지도 빼앗고 수만 명의 미국군을 육군이 항복시키는 등 1942년까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종횡무진하며 제국의 제해권을 확립하였지만,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으로 일본은 이후 쇠퇴하기 시작한다.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일본 해군은 여기서 항공모함 4척이 침몰되고 순양함 1척, 그리고 항공기 248기가 손실되고 3천 명의 병력이 사망한다.

 

미국은 항공모함 1척, 구축함 1척, 항공기 약 150기가 손실되고 307명의 장병이 전사하고 마는데, 이로 인해 주도권은 미국에게 넘어간다.

 

이후 미국은 일본이 구축한 여러 섬으로 상륙하여 하나씩 점령하는 상륙전을 전개하였다.

 

 

 

 

일본은 여기서 지휘관은 칼을 들고 병사는 총검으로 돌격하는 반자이 어택과 가미카제 전술, 그리고 가이텐과 인육 섭취 등 엄청난 엽기 행각과 막장 전술로

 

사람의 생명을 중시하지 않는 풍조가 성행하여 병력이 대거 감소하게 되는데, 이는 전쟁의 전황을 바꾸기에는 상당히 불리함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미국과의 전투에서 현지 원주민과 주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자살 공격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일본군 내에서도 서열 싸움이라든지 상급자의 집단 폭행이 있었기 때문에 군의 기강 및 기풍은 크게 쇠퇴하였다.

 

<전진훈>의 교리에 따라 무장한 미친 정신 병자 집단인 일본군은 광폭한 귀신 마냥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미국군을 괴롭혔으며,

 

생명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졌다.

 

간혹 전투에서 퇴각하거나 제대로 싸우지 않는 일본군은 장교의 칼에 의해 목이 잘리는 참형을 받기도 했다(서태평양, 남방 군도 방면에서의 처형 일지).

 

이렇게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군은 10만 명이 사망하였고 영국군은 8만 명이 사망하였다.

 

일본 제국군의 피해는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으며, 40만 명 가량의 민간인이 일본군의 강요에 전투에 참가되어 사망하였다.

 

미국은 압도적인 화력과 우수한 해군으로 일본이 장악한 태평양의 섬들을 장악하고 바로 본토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일본 제국군의 병력은 제국 방위선 전체에 700만 명이 존재하였으며, 일본 본토에만 추가적인 병력이 편성되어

 

<1944-1945년 일본군 병력 현황>

 

만주 + 한반도 북부 : 100만 명 이상

한반도 전체 : 50만 명

중국 전역 : 100만 명 이상

일본 본토 : 400만 명(육군 235만 + 해군 130만 = 긴급 편성)

여타 제국 지배 지역 : 수십만 명

민병대원 편성 : 2800만 명

 

총 일본군 병력 : 최소 700만 명(+ 민병대원 2800만 명)

 

235만 명의 보병과 130만 명의 해군이 미국의 상륙에 대비하여 해안선을 지키고 있었다.

 

가미카제 전투기만 8000대가 구축되었고 미국의 함선을 집중 공격하여 많은 미국 전투기가 부서지거나 젊은 미국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소련군은 일본에 선전 포고를 감행하고 만주를 침공하였으며, 조선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제국 대본영의 방침과 함께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의 병력만 45~50만 명까지 늘어났다.

 

태평양 전쟁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일본군은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이고 한 명 한 명이 끝까지 저항할 판이었다.

 

일본 본토에서만 수천 개가 넘는 다용도포와 기관포가 구축이 되었고 학교에는 휴교령이 떨어지고 책상 걸상은 무기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죽창 훈련 및 총검 훈련이 학교 운동장에서 시행되면서 미국에 대한 항전을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보고서에서 규슈와 관동 지역의 일본군이 빠르게 재건하는 상황을 보고 기겁했으며, 이대로 갔다가는

 

수십만 명의 미국군이 사망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미국 정보 당국은 원폭 투하를 심각하게 고려하였다.

 

결국 미국 정보 당국의 신중한 고려와 함께 원폭 투하가 결정되었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됨으로써 일본군은 항복하였다.

 

참고로 일본은 전쟁 기간 내내 62,795대의 항공기를 생산하였지만, 미국에 의해 52,109대를 잃었으며, 20척의 항공 모함에서 16척이 파괴되었다.

 

미국의 생산력은 일본에 비해 더욱 압도적이고.

 

 

 

<3줄 요약>

 

1. 메이지 시기의 일본은 대외 팽창을 시작하면서 제국주의 국가로의 길을 걸었다.

2. 다이쇼 시기의 일본은 큰 호황을 누려 경제적 성장 및 구축을 마련했으며, 다이쇼 말기에는 경제 불황과 대공황으로 그 중심을 잃게 된다.

3. 그래서 쇼와 시기에는 만주 사변부터 해서 침략 전쟁을 개시하며,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고 원폭 투하로 항복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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